이번 편에서는 동양이 아니라 서양이 세계를 지배한 이유와 유럽이 일본처럼 통일이 되지 못했더 이유, 경제위기 발생시 3가지 대응 메뉴얼, 대약진운동으로 망할 뻔한 중국이 어떻게 남순강화로 살아났는지, 중국이 원하는 제조업2025, 2018년에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 이유를 알아보려고 한다.
4. 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혁신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494년의 프랑스군과 16세기 말의 네덜란드군에 의해 시작된 두 차례의 군사 혁명은 서유럽의 군대를 무적의 강군으로 바꿔 놓았고, 이 덕분에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플랜테이션을 건설할 수 있었다.
1800년을 전후한 산업혁명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나 300년 동안 해상 교역로에서 어마어마한 이익을 내고 있었던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증기기관이나 철도 같은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도구들을 개발하는데 많은 투자가 필요했으니, 결국 원거리 무역으로 발생한 이윤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16세기 부터 오스만 제국을 앞서갔던 이유는?
'화약'무기의 도입과 발전 덕분이었다.
화약을 발명한 곳은 '중국'이다. 손사막이 쓴 책 '단경'에 목탄과 초석 그리고 유황을 배합해 화약을 만들 수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게 바로 흑색 화약이다. 이후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고, 송나라 때 돌화총(대나무 소총)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화력이 워낙 약해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후 조총, 불화살, 블랑기포 등을 유럽에서 역수입하여 사용하였다.
화약 무기를 처음 발명한 건 중국인데 왜 유럽에서 화약 무기가 빠르게 개선되었을까?
15세기 말 유럽에서 '군사 혁신'에 덕분이다.
1483년 프랑스 국왕이 된 샤를 8세는 당시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오스만 제국을 꺾고 유럽을 제패하겠다는 야망에 불타 있었다. 하나는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동맹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운좋게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 사망하여, 프랑스 상비군 + 스위스 창병 고용 + 포병으로 나폴리로 원정을 떠났다.
(참고로 르네상스 시대 1350~1600년에 이탈리아는 동방의 무역과 신흥 상인 계급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가운데 예술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쌓은 부와 명성은 주변 유럽 국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약탈'대상이었다)
14세기 유럽에 화약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화약은 적의 성벽을 뚫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으나, 이후 100년 정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혁신이 이뤄졌다. 프랑스 왕실의 대포 제작자들이 교회 종을 주조하는데 사용하던 기술로 가볍고 기동성이 향상된 청동 대포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탈리아 군대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군사 혁신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1494년 10월, 나폴리의 왕국의 군대가 첫 번쨰 희생양이 되었다. 그렇게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샤를 8세는 파죽지세로 이탈리아 전역을 제패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견제와 이탈리아 북부 도시 국가들의 동맹으로 프랑스의 보급선이 차단되면서 일이 틀어졌다. 그 후 1503년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프랑스의 '무적 신화'는 10년도 못가고 막을 내렸다.
프랑스가 패권을 잃게 된 요인은?
1. 경쟁자들이 프랑스의 혁신적인 전술을 신속하게 모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스페인의 테르시오 방진은 1494년 프랑스군이 선보인 것처럼 적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해 창병을 집중 배치한 진형인데, 화승총병을 창병 주변에 두어 배후를 공격당하는 위협을 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전술의 '개량판'이라고 볼 수 있다.
2. 스페인을 비롯한 경쟁자의 재정 부담 능력이 강화되었다(당시 세금의 대부분이 군사력 강화로 쓰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뛰어난 용병 부대를 고용하는 것은 물론 이들도 화약 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3. 대항해시대의 촉발
15세기 말 을 고비로 스페인과 영국 등 서유럽 국가가 일제히 바다로 나갔던 것은 당시 귀금속의 가치가 치솟았고, 프랑스의 패권을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서유럽이 17세기 초반의 일본처럼 '통일'되지 못한 이유는?
1. 상당한 운
13세기 몽골의 동유럽 침략과 15세기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한 동로마 제국에서 보듯, 서유럽이 군사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이슬람과 몽골족이 유럽을 침략했더라면 서유럽이 세계사를 주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몽골 칸이 사망하고, 오스만 제국은 빈의 성벽 앞에서 저지되었다.
2. 지리적 장벽
유럽은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등 아주 큰 산맥이 각 지역을 갈라놓은 데다, 다뉴브강과 라인강 등 여러 거대한 강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결과, 유럽은 황무지와 삼림으로 이루어진 대륙 여기저기에 경작에 적합한 지역이 흩어져 있다 =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도 다양하다.
로마 제국도 결국 엘베강 동쪽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게르만족에게 무너진 일,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침략 실패 등이 지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5. 경제위기 대응 메뉴얼의 핵심 내용 3가지
-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 즉각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해 경기 주체들에게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단호한 메세지 전달하여 연쇄적인 뱅크런의 위험을 낮추고, 금융기관들이
'염가매각'의 충동을 느끼지 않도록 유도해야한다. - 그럼에도 '염가매각'의 압력이 높아지고 상호간에 대한 신뢰가 약화될 때에는 유동성 지원에 나서야한다.
금융기관이 보유한 우량 대출을 담보로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주어 추가적인 금융위기 확산을 막아야 한다. 이는 금융기관이 정상적으로 영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다. - 금리 인하에도 경기 여건이 가파르게 약화될 때에는 신속하게 양적완화를 단행해야 한다.
염가매각 충격으로 채권시장마저 혼란에 빠져들 때에는 연준 말고는 이 사태를 진정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6. 중국 부활의 신호탄 '토지개혁'
저개발 국가의 현실 & 1978년 중국의 3가지 악순환
-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식량 자급이 어려워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 소득이 생존 수준에 간신히 걸쳐 있어, 경제 내에 저축이 부족했다 => 정부가 돈이 없어서 어떤 산업을 발전시키질 못했다.
- 제대로 교육할 여력이 없었다 => 소득이 낮은 상황에서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할 여력이 없다.
1958년 마오쩌뚱의 '대약진운동'
이것으로 중국 경제는 치명타를 입게 되며 약 4,00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 수는
5,500만 명, 몽골족의 세계 정복 과정 중의 사망자 수는 4,000만 명 정도이다. 모든 인력과 자원을 중화학공업에 투입하는 한편, 생산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농민들이 가진 땅을 빼앗아 집단 농장에 편입시켰는데, 이것이 패착이었다.
집단 농장에 편입될 때 가축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긴다는 것을 알아챈 농민들이 농기계가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축을 도축하는 바람에 농업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에게 돌아가는 몫이 늘어나지 않게되니 농민들의 근로 의욕이 악화되었다.
1976년 마오쩌뚱의 사망 후,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게 된 1978년 샤오강촌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집단 농장 해체'이다. 덩샤오핑이 지지를 하여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1952~1977년까지의 농업 생산액은 연 평균 4.1% 증가한 반면 1978~1995에는 연 평균 14.9% 증가했다. 전체 인구의 82%가 살고 있는 농촌 지역의 소득 증가는 경제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져 연평균 약 10%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 농업 생산성 개선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농촌의 소비가 대규모로 늘어났다. 또한 농업의 성장은 대외 교역 면에서도 긍정적이었다. 식량 수입 필요성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무역 수지가 개선되었고, 그 결과 산업화에 필요한 각종 자본재를 수입할 수 있었다.
- 선순환으로 제조업도 발달했다. 농업의 발달로 생겨난 잉여 인력이 도시 공장 근로자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 복지 측면에서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가난한 나라는 실업수당, 국민연금 같은 복지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데, 불경기 때 해고 당한 공장 노동자들이 가족 농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이것이 '가족농 시스템'의 장점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것과 국가주도 경제 시스템이 와해될 우려가 높아졌다.
중국이 세계 최대의 제조 국가로 설 수 있었던 이유 2가지
- 소련의 해체에 따른 글로벌 투자자금의 중국 이동
- 무제한에 가까운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에도 시장이 있다"며 시장 개방 및 개혁 조치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밝혔다. 1993년 제14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도 부실 국유기업의 개혁을 비롯한 대대적인 시장경제 확대 조치를 취하며, 남순강화 선언이 공산당의 지속적인 정책 방향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개혁개방 노선이 명확해지면서, 경제 성장을 촉진하였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규모가 1% -> 6%로 급증하며 인플레 문제가 해결되었다. 대부분 제조업 부문에 투자금이 몰렸으며 산업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국영기업도 대대적인 경쟁에 노출되면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1992년 국영기업의 임금 구조에 자율권을 허용했다. 또한 농업 노동자들의 이동을 허용함으로써 거대한 도시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참고로 덩샤오핑은 정치제도까지 바꿀 생각은 1도 없었다.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의 핵심 2가지
1. 강력한 인센티브
외국인이나 국내 기업이 제조 공장을 설립하는 경우 토지 임대료를 경감해주는 등 혜택 제공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제공한 인센티브의 핵심은 저금리였다. 1978~201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약 10%였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약 6%에 이르니 명목성장률은 약 16%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이 때 기업들에게 제공되는 금리 수준이 약 5%였는데 '과잉 대출'이 발생했다. 대출금리가 1인당 소득증가(=명목성장률)보다 지나치게 낮을 때는 강력한 '대출 수요'가 발생한다. 도시 노동자들의 소득증가로 부동산이 줄곧 상승하니, 부동산에 투자만 하면 돈을 벌기 때문이다.
2. 강력한 규제
1960년대 박정희 정부처럼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수출하라" 식의 규제를 하는 것이다.
기업이 수출을 늘리고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여간다면 중국 정부에게 무제한에 가까운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수출을 하지 않고 내수시장에서 부동산 투자에 몰두한다면 강력한 조치를 받게 된다. 샤오미와 화웨이가 성공 사례이다.
#한계생산물 체감 현상
1마지기의 토지에 쌀 농사를 지을 경우, 1명이 일할 때보다는 2명이 일할 때 더 많은 수확량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2명이 3명, 3명이 5명으로 늘어나는 순간 추가적인 생산량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이런 현상을 '한계생산물 체감 현상' 이라고 한다.
슈청청: 호주 워홀의 농장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블루베리가 많이 없을 때, 크루 인원들이 많아진다면 일을 많이 하지 못한다. 반면 피크 기간에는 그 많은 인원이 하루종일 일해도 당일 수확량을 못 채우는 경우도 있다.
제조업2025 전략
이제 마진이 적은 최종 조립만 해주는 것이 아닌 기술 가치 사슬의 최상부에 위치한 완제품 디자인과 마케팅, 직접회로 디자인, 오리지널 소프트웨어 등을 자체 기술력으로 직접하겠다는 전략으로 제조업 기반 육성과 기술 혁신 등을 통해 중국의 경제 모델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바꾸겠다는 일종의 산업 정책이다.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2015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처음 발표했다.
즉, 핵심 부품과 자재의 국산화율을 2020년까지 40%로 끌어올리고, 2025년에는 70%까지 달성하여 10대 핵심산업(정보통신기술, 로봇, 항공 우주, 고속철도, 고효율&신에너지 차량, 신소재, 바이오 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각종 보조금과 혜택 등을 지원하고 있다.
2018년이 돼서야 미중 무역분쟁이 발발한 이유는?
미국 내부의 변화가 있었기 떄문이다.
- 불평등의 심화
=> 미국 기업이 중국에 대거 진출해 공장을 세운 결과, 소비자들은 싼 값으로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자유무역으로 중서부&중남부 지역의 제조업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참고로 이 지역 상당 부분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 셰일 오일 혁명
=>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의 경찰'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크게 2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맞닿아 있는 나라들을 키워 '방어막'으로 쓰는 게 이득이었다.
두번 째는 중동의 석유 생산국으로부터 선진국으로 이어지는 수송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2가지 이유 모두 사라졌다. 소련이 해체 되었고 셰일 오일 혁명으로 에너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미국은 이제야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느낀 점
돈의 역사 1편을 1년 전 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홍춘욱 작가님 덕에 세계사에 관심이 생겼고, 많은 역사 유튜버를 보게된 계기가 되었다. 세계사를 공부하다보니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느껴져 부끄러웠다. 역사를 통해 패권국은 항상 바뀌었다는 것, 기후와 지리는 나라의 흥성망쇠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 잘못된 지도자를 뽑으면 나오는 암담한 결과 등을 알게되었는데 이는 내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지 몸소 느끼게 해주었다. 책과 유튜브를 통해 지금은 세계 정세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이 한 분야만 파고 공부를 했다면, 어떤 현상에 대해 다룰 때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되지 않을까?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당하기 싫어 받아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배움에 있어서 넓은 분야를 공부하길 원하고, 한 쪽으로 치우쳐지지 않게 다양한 관점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싶다.
배운 점
- 화폐의 3단계 발전과정과 장단점
- 중국 사람들이 은과 금을 좋아하는 이유
- 후추와 설탕이 불러온 제국 시대
- 기후의 중요성 - for 농사
- 십자군 전쟁과 백년 전쟁의 바탕
-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과 같은 전염병의 위력
- 동양이 아니라 서양이 세계를 지배한 이유 - 치열한 경쟁과 혁신
- 유럽이 일본처럼 통일이 되지 못했더 이유 - 운과 지리적 요인
- 경제위기 발생시 3가지 대응 메뉴얼
- 대약진운동
- 남순강화
- 못살던 중국이 커진 이유
- 한계생산물 체감 현상
- 제조업2025
- 2018년에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 이유
총점
금융과 세계사를 연관지어서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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