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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요남] 책 요약 해주는 남자/교양을 위한 책

[돈의 역사 2] 요약1 - 화폐의 3단계 발전과정과 장단점, 중국 사람들이 은과 금을 좋아하는 이유, 후추와 설탕이 불러온 제국 시대, 십자군 전쟁과 백년 전쟁의 바탕, 전쟁 < 전염병 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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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에서 금융과 관련된 방대한 역사를 배웠었는데 2권이 나와서 빌려보았다. 홍춘욱 박사의 책은 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알려준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적극 추천한다.

 

이번편에서는 화폐의 3단계 발전과정과 장단점, 중국 사람들이 은, 금을 좋아하는 이유, 후추와 설탕이 불러온 제국 시대, 십자군 전쟁과 백년 전쟁의 바탕,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과 같은 전염병의 위력 등을 알아보자.


1. 신안 보물선의 비밀

중국 상인들이 일본 하카타를 향해 향해한 이유는 교초(당시 중국 지폐)의 사용이 일반화되고, 나아가 교초의 가치가 나날이 떨어지는 가운데 중국 남부 상인들은 일본과의 교역으로 차익거래를 했던 것이다.

화폐의 3단계(실물(현물)화폐 -> 금속화폐 -> 신용화폐) 발전 과정

실물화폐란?

조선의 면포, 일본의 쌀처럼 사회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실물을 화폐로 사용하는 것

실물화폐 장점

실물화폐 시스템은 매우 간명하며 직관적이다. 쌀과 면포가 가지고 있는 사용 가치가 명확하니 사람들도 이를 화폐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실물화폐의 문제점 3가지

  1. 가치가 너무 쉽게 바뀌거나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계절마다 가격이 변동한다)
  2. 부피가 크고 무거워 거래의 편의성이 떨어진다. (소 달구지에 싣고 가서 거래하면 매우 불편하다)
  3. 품질이 동일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품질마다 가격을 새로 매겨야한다)

금속화폐란?

실물화폐의 문제점을 보완한 것

E.G.) 한 무제 시절의 오수전, 조선 숙종 때의 상평통보

나라에서 일정한 크기와 무게를 가진 화폐를 주조해, 세금을 동전으로 수취한 것

금속화폐의 2가지 장점

  1. 가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금속화폐는 구리 혹은 주석, 은 등으로 만드는데, 기본적으로 채굴 가능한 금속 매장량이 정해져 있다 보니 장기간에 걸쳐 그 가치는 대체로 일정하다.
  2. 휴대가 편리하다. 수십 혹은 수백 개의 동전을 끈으로 묶어 사용했다.

신용화폐란?

현재와 같이 동전 같은 금속화폐 대신 나라가 발행한 지폐로 실생활에서 거래하는 것

신용화폐의 장점

경제 성장에 필요한 통화를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금과 은을 좋아하는 이유는? 홍콩에 금은방이 명품 가게보다 많은 이유는?

흑사병의 등장 - 1344년~1345년(14세기) 

14세기 중반 중국에서 유행한 새로운 전염병이 페스트(흑사병)일 것이라 추정한다. 페스트를 처음으로 유럽에 전염시켰고, 1347년 콘스탄티노플과 이탈리아에 퍼트린 장본인이 몽골군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이 유럽에 가져온 흑사병의 근원지는 중국 내륙 고산지대로 추정되는데, 사상 초유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예전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았던 곳에 존재했던 지역적 풍토병에 접촉해 확산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 경제는 흑사병의 대유행 + 홍건적의 난으로 25년에 걸친 혼란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이는 상거래를 위축시키고 국가의 재정을 망가뜨린다. 이와 같은 사건이 중국인들에게 지폐 혹은 신용화폐에 대한 불신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종이 화폐로 재산을 축적해도, 정부가 대규모로 화폐를 발행할 경우 가치가 떨어지는 데다, 심지어 나라가 멸망하면 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특히 몽골 귀족들이 오히려 지폐를 발행해 시중에서 거둬들인 은 덩어리를 선호하고, 선물이나 거래 수단으로 은을 중시했던 것도 귀금속에 대한 선호를 높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디플레가 발생하면 쌀과 비단 같은 핵심적인 상품의 값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현물화폐 시스템으로 후퇴한다. 값이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금이나 은, 동전은 모두 부잣집 금고로 들어가버릴 테니 비단이나 쌀이 어쩔 수 없이 화폐의 대응 수단이 될 것이다.

한무제가 서역 원정에 나선 이유는 디플레이션 떄문이다?

무제 때 디플레가 발생한 건 '생산력' 회복 때문이었다. 장기간 이어진 안정기에 버려졌던 땅이 다시 일궈지며 식량 생산이 급격히 늘어난 반면, 동전 생산량이 이에 비례해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돈의 상대적 가치가 500배 상승했다.

곡물 가격이 내려가면 무엇이 문제일까?

옛날 곡물 값의 폭락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삶을 곤궁하게 했다. 게다가 곡물 가겨이 떨어진 상황에서 역병이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농민들의 삶은 일거에 붕괴될 위험이 높아진다. 빚을 지고 갚지 못한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땅을 버리고 대지주의 소작농이나 상인의 하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이는 기원후 2세기 로마에서 벌어진 일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전쟁을 치르는 게 어떻게 디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까?

전근대 사회에서 전쟁이 빈발했던 이유는 상대가 가진 것을 약탈하기 위한 욕망뿐만 아니라 경제 내에 존재하는 만성적인 디플레 위험을 해소시킬 목적도 컸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면 농사지을 인력이 부족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군량미 지출이 늘어나 곡물 비축량이 순식간에 줄어들거나 고갈되어 곡물 등 생필품 가격이 다시 상승한다. 

 

E.G.) 수나라 양제(7세기 초반)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10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한다. 사실 이 10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고구려에 직접 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숫자는 인구가 희박한 변경 지역으로 수십만의 부대를 보내기 위한 많은 수송 병력 + 대운하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간접자본의 정비에 많은 인력이 동원을 포함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상거래가 위축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가 어려워지면, 어떤 일을 전업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바로 '시장의 규모가 분업을 결정'하는 특성 때문이다. 디플레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분업이 어렵다. 화폐 공급이 감소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쌀과 옷같은 생필품 가격이 계속 떨어질 거라 기대할 것이며, 나아가 상거래의 어려움까지 겹쳐 '소비'를 최소하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옷이나 농기구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가구는 자칫 과잉 재고를 끌어나고 도산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결국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사라지고, 돈을 꾸는 것도 어려워져서 경제 전반의 침체가 장기화 된다.

경제의 흐름을 판단할 떄 가장 중요한 것

물가가 오르는지 내리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 디플레 발생시: 비단, 은, 쌀 같은 물건의 값이 떨어지는 현상으로 생활 수준 자체가 어려워져 경제가 장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다. 
  • 인플레 발생시: 돈의 값어치가 계속 떨어지는 현상으로 가격 변동이 심해지고 경제 전반에 강력한 투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옛날이라면 비단, 은, 쌀 같은 실물자산을 보유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2. 전염병이 번질 때, 경제는 어떤 변화를 겪을까?

어떻게 전염병으로 인구의 절반이 죽을까?

어떤 집단에 처음 들어온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아직 면역력이 생기기 전이라 모든 연령에 급성질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오늘날의 바이러스와 흑사병을 겪은 14세기 유럽 사이에는 '생활 수준' + '공공 방역 시스템의 유무' 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전염병이 급격하게 확산될 때,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가장 먼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를 검역해야 한다. 검역할 수단이 없다면 바다 위에 2~3주 머무르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했다면,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이고 환자를 격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1348년 중순, 영국 에드워드 3세는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기도회를 주관해 달라 했고,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다. 이는 병원균의 전파를 부추겼다. COVID-19처럼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바이러스가 급격하게 확산되었듯,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전염병은 쉽게 퍼지기 마련이다.

후추 다음 먹거리는 '설탕' 

인도를 통해 전해진 설탕은 곧 이슬람을 거쳐 유럽인들에게 최고의 인기 품목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사탕수수는 열대지방에서 자생했던 식물이었기에 유럽인들은 '서인도 제도' (쿠바나 자메이카 같은 카브리해의 여러섬)으로 떠났다.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끌려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가혹한 노동으로 쓰러졌고, 특히 16세기 말을 전후해 유럽 or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가 유입되면서 말라리아 내성에 관한 유전이 없던 원주민 사망률은 더욱 높아졌다.

 

결국 설탕 플랜테이션을 경영하려는 유럽인들에게 남은 선택은 말라리아에 그나마 면역력을 가진 서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를 수입해 노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메리카로 아프리카 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1451~1867년 사이
아프리카인: 유럽인 = 3:1 정도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미국 인구의 흑인 비율은 전체의 9%이다. 이는 비싼 값을 주고 산 '노예 노동'의 가혹함 + 노예 부부는 건강한 자녀를 낳아 키우기 어려움의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값싼 노동력을 데려오면 되지 않았나? 

2가지 문제가 있었다.

  1. 계약 기간이 끝나는 즉시 노동자가 농장을 떠나거나 새로운 경쟁자로 변신할 가능성이 있었다.
  2. 말리리아가 날이 갈수록 창궐하여 유럽 노동자들의 건강 역시 급속도로 나빠졌다.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는 같은 식민지였는데 현재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나게 되었을까?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는 흑인 노예 비중이 10~20%였던 반면, 서인도 제도에서는 흑인 인구 비중이 90%였다. 즉, 영국 사람들이 이주한 북미는 자영농 위주의 나라가 된 반면, 서인도 제도에서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시스템만 이식해 놓아 경제 성장 경로가 달라졌다는 주장이다.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어보자.

왜 북미에는 흑인 노예 인구가 10~20%에 불과했을까?

말리리아와 사탕수수 때문이었다. 북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은 겨울철에 기온이 매우 낮아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고, 모기도 번식하기 힘들다. 따라서 북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싼값에 계약 이민 하인(대서양 횡단에 드는 비용을 갚을 때까지 하인으로 일하기로 계약한 노동자)을 고용해 오는 게 더 유리했다. 이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농장을 떠나 서쪽으로 이동해 새로운 농장을 가진 자영농으로 변신했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권익을 침해한다 싶을 때는 화승총을 들고 언제든지 맞설 자세를 가진 '민주적인 시민'으로 행동했다. 1776년 북미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이런 배경도 있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국민 대부분이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채 지주들에게 수확물의 대부분을 바쳐야 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17세기 말 200만 명의 인구는 18세기 중엽에 800만 명 이상이 되었다. 바로 '감자' 덕분이다.

아일랜드 18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감자가 들어왔는데 생산성이 아주 높았다. 밀 1에이커당 600kg = 감자 1에이커당 11,600kg. 거기다가 영양가도 높았다. 감자로 채워지지 않는 유일한 영양분이 칼슘인데 이것은 우유로 해결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구이노(새의 분변으로 만든 천연비료)를 수입하려는 순박을 통해 '감자마름병'이 상륙했다.

거기다가 이상기후 + 영국인 지주들의 '곡물 수출' 등 으로 1846~1847년 아일랜드에서 200만 명 이상이 기아와 이로인해 파생된 병(결핵, 홍역 등) 으로 죽었다.

 

이 때, 산업혁명으로 인해 대서양 운임비가 1/3~ 1/4 수준으로 급락하여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이민을 갔다. 하지만 이들은 'Wgite Nigger' 라고 천대받았다. 이민자의 증가로 기존 주민들의 소득이 낮아진 데다가 이민자들이 돈을 버는 죽죽 토지를 사들여서 임금 수준이 주택이나 농장의 가격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어 미국 근로자들이 예전보다 더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존 F.케네디 대통령은 이들의 후손이었다.

전쟁보다 무서운 '스페인 독감'의 나비효과, 미국 이민법 개정

전쟁보다 전염병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 폭격의 규모와 이후의 경제 성장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BUT 전염병의 여파는 달랐다. '스페인 독감'은 20세기 5,000만 명 이상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 전염병은 각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도 바꿔놓는다.
  • 기아와 전염병이 장기간 지속된 뒤 '혐오 민감성'이 높아진다. EX) 코로나 사태의 중국인
  • 질병과 직접 싸우는 신체적 면역체계와 함께 우리를 감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준다고 해서 '행동적 면역체계'라고 불리는 시스템이다.
  • 이를 통해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것을 배척함으로써 실제 감염을 피할 수는 있지만, 부작용도 많다.
  • 외집단을 배척하고 내집단을 옹호하는 이른바 '내집단 편향'이 강화되며
  • 익숙하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 '확증 편향'도 강화된다.

E.G.) 흑사병이 돌 때마다, 유태인 및 마녀에 대한 박해가 반복되었다. 

=> 지배자들은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사회 내에서 가장 약한 계층에게 그 책임을 떠넘겼다.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으로 미국에서 서서히 '외집단'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1921년 이민법을 강화했다. 

연 100만 명 이상이 계속 이주하던 나라에, 갑자기 인구 유입이 줄어든다면 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1. 경제 성장률이 둔화된다.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이민자들이 없었다면 노동력 공급이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인데 이를 막았다.
    20~30대 이민자들이 결혼하여 정착하고 아이를 나항 키우는 과정에서 소비를 부양했는데 어려워졌다.
  2.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기업의 수익이 악화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제품을 생산하는지 측정하는 것)이 실질임금을 못 따라갔다.
    회사 입장에서 근로자들이 시간 당 1대 생산하던 것을  2대 생산한다면 임금을 2배 올려줘도 괜찮지만, 생산성이 임금을 못 따라가면 회사입장에서는 신규 고용을 꺼리게 된다.
  3. 경제 불평등이 완화된다.
    새로운 노등력 공급이 차단되며 평균적인 임금 수준이 상승했는데 특히 저학력, 저숙련 근로자들의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에 저소득 백인 남성의 지지가 높은 이유이다. 아시아,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경제 성장이 촉진된다 해도, 그들과 일자리를 놓고 직접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저학력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크게 확산될 때 벌어진 결과로 본 3가지 시사점

  1. 1인당 소득이 올라가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사람은 부족해지고 토지는 풍부해지니, 상대적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출현하는 셈이다.
    경제 전체 규모는 줄어들 수 있지만 1인당 돌아가는 몫은 오히려 늘어난다.
  2.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의 경계가 나뉜다.
    소수의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손쉬운 해결책이 되는 탓이다.
    본능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영향이 있다.
  3. 보호무역주의 흐름의 대두이다.
    '우리끼리 잘살자'라는 생각이 높아진다.
    심리적 거부감이 부각되고 외부자에게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는 보호무역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게 된다.
    전간기 당시, 잘사는 나라일수록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높았던 반면 1인당 소득이 낮은 나라들은 더 못살게 되었다. 이민의 길이 막히면서 선진국의 기술을 습득하고 돈을 벌어올 방법이 사라진 데다, 힘들게 투자해 공장을 짓더라도 수출길이 막혀버렸기 떄문이다.
    못사는 나라에게는 수출이 유일한 타개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수 시장은 질 좋은 물건을 내놓더라도 이를 구매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간기(戰間期)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의 기간이다. 1918/11/11일~1939/9/1일까지의 시대이다.

3. 기후변화가 바꾼 역사의 분기점

9세기 무렵, 바이킹이 북미부터 러시아 남부까지 왕성한 탐험을 지속한 이유는?

인구 증가 때문이었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은 워낙 환경이 척박해 예전부터 인구가 많지 않았는데, 기후 온난화 덕분에 농사가 잘 되어 인구가 크게 늘어나게 됐다. 

#중세 온난기(950~1250년)

로마 제국의 멸망을 불러왔던 이상 한파가 사라지고 기온이 예전에 비해 1~2도 높아진 시기이다.

#小빙하기=Little Ice Age(1300~1860) 

중세 온난기에 비해 기온이 2도 가까이 내려갔다. 기후학자들은 이떄 기온 하강의 영향으로 전쟁과 혁명이 빈발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E.G.) 1789년 프랑스 혁명, 17세기 중반의 명나라 멸망

평균 기온 1~2도 오른 게 무슨 변동을 유발할까? 

농업 기술 수준이 낮아 기상 여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농경 사회에서 기온 상승은 일종의 '횡재'나 다름없었다. 작물이 잘 자랄뿐더러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의 수도 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사회 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2가지

  1. 남아도는 인구를 해외로 이주시켜 인구를 분산하는 것 => 식민지 개척
  2. 대대적인 전쟁을 통해 영토를 늘리는 것 =>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시작한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1095~1291년)

이에 대한 배경으로는 '인구 과잉'이 있다. 겉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을 내세웠지만, 토지를 원하는 농민 그리고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상속 받을 장원을 마련하지 못한 상류 계급의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진다. 또한 당시 중동 지역이 서유럽보다 훨씬 부유했다는 점도 십자군 원정을 부추긴 요인 중 하나이다.

영국VS프랑스의 100년 전쟁(1337~1454년)

14세기 초반, 전환의 시기가 찾아왔다. 날씨가 급변해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졌고 봄에는 폭우가 쏟아져 밭과 목초지가 물에 잠겨 농작물이 썩어갔다. 군대는 농민들의 식량을 약탈했고, 지배층은 소작농게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굶주림이 일상화되었다. 

 

더군다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예전에는 경작하지 않던 토지까지 모조리 활용하던 상황에서 발생한 기후변화는 수많은 이에게 재앙이 되었다. 땔감은 부족했고, 새로 개척한 땅은 그다지 비옥하지 않아 기온 하강과 더불어 수확량이 급감했다. 즉, 1347년 유럽에 들어온 흑사병은 방아쇠를 당긴 것일 뿐, 이미 유럽은 '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주기적인 나일강의 홍수를 의미한다. 하지 이후 100일 동안 나일강이 범람했다가 물이 서서히 빠져, 다음 해 하지가 올 때까지 낮은 수위가 유지되기에 이집트가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홍수가 나는 동안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상류에서 내려온 비옥한 흙이 영양분을 공급해주었기에 문제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땅은 병충해가 생기고, 표토의 영양분이 고갈되어 수확량이 감소하는데,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며 오히려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BUT, 이 지역에서는 11세기부터 날씨가 추워지면서 황폐해졌다 + 비옥한 초승달 지대도 함께 영향을 받으며 현재 사막화가 되었다.

황허강에 가뭄이 든 시기마다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 있었다.

반대로 황허강에 홍수가 들거나 비가 자주내릴 때에는 침입이 줄어들었거나 북방 민족이 점유하는 영토가 줄어들었다. 12세기 이후 小빙하기로 접어들면서 기후 여건이 악화된 것이다. 그리고 인구 증가에 따른 황허강 상류 지역의 환경 파괴 등이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거라 판단된다.

중국의 1인당 소득은 언제 영국에게 추월당했나?

중국 역사상 12세기 송나라 때가 가장 부유한 시기였다.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송나라 시절만큼 부유한 적이 없었다. '스티븐 브로드 베리'가 영국과 중국의 1인당 소득을 연구했는데, 북송과 명나라 초기에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았으며 청나라 때부터 지속적인 감소 흐름이 나타났다. 경제적인 외형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감자와 고구마 등의 작물이 신세계에서 유입되면서 인구가 늘어난 동시에 1인당 소득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영국에게 확실하게 추월당한 시기는 명나라 중엽(약 1500년, 0.7배)으로 볼 수 있다. 큰 격차는 역시 1차 산업혁명이 발발한 1750년(약 2.5배)~1850년도(5배) 차이까지 나게 되었다. 

ESG란?

Environemnt = 환경이나

Social =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 행사

Governace =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에 투자한다는 원칙의 첫 글자를 딴 것

 

즉, 환경에 위해를 끼치거나 사회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 소극적 전략부터 친황경 및 친사회적 기업에 투자와 지원을 강화하는 전략을 포함한다. 현재 까지의 투자 성과는 별로지만 ESG ETF 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봐서는 장기적으로 전망이 밝다고 생각된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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